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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즈음 대학 학부생활을 하면서, 너무 늦기 전에 다시 수능시험을 치룰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부족한 용기 탓에 실천에 옮기진 못했지만.
그저그런 2년이 지나고, 2학년 시절 컴퓨터 실습조교를 할 때, 신입생들에게 자기소개서를 써오라는 과제를 내 준적이 있다. 내가 담당하는 클래스는 인문대학. 게 중에는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이 있었나보다. 고등학교 때는 잘나가는 명문고를 나왔는데, 수능시험을 망쳐서, 운이 좋지 않아서, 내가 지금 여기, 강원도 강릉에 있다는 "신세한탄" 자기소개서가 꽤 많이 보였다.
제출한 자기소개서에 대한 내 의견을 학생 한명한명에게 메일로 보내주었다. 물론 적지않은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이것이 내가 조교를 하기로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기 때문에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대학 4년 중 1학년 시절을 제외하고 나머지 3년간 컴퓨터실습 조교활동을 했다. 매학기 수업이 시작하자마자 난 자기소개서를 과제로 내주었고, 4명 중 1명정도의 학생은 신세한탄 자기소개서를 작성하였다. 나도 그 시절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기에, 그 학생들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고 느꼈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참견이었지만.
대학 3학년 총회에서 학생회 학술부장 소개인사를 할 때였다. 난 선배들과 후배들에게 정말 하고싶은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잘나가던 이 국립대학교가 어쩌다가 대한민국 중하위권 대학으로 취급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 불만사항과 우리가 노력하면 바꿀 수 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 때 사람들이 얼마나 호응을 해 주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 점점 후퇴하고만 있는 학교를 바라보면 부질없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교 마지막 학기. 4학년 2학기 때, 우연히 타과 전공수업을 듣게 되었다. 타과전공이라고 해도 같은 학부내의 학과라서 그다지 이질감은 없었다. 수업은 그 학과의 2학년 생들을 대상으로 한 수업이었다. 수업 첫날에 자신만 믿고 따라오면 나머지 학년 편하게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교수님의 호언장담을 듣고, 속으로 '저런 소리를 처음부터 하는 교수치고 잘하는 사람 보지 못했다' 라는 생각을 했다.
학기 중반까지는 진도는 확실하게 빼주고, 빠진 일수 만큼 보강도 확실하게 해주셨다. 그러던 어느날, 아마 중간고사가 끝난 뒤로 기억한다. 갑자기 수업을 하던 도중 교수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너무 말을 안듣고, 공부를 안하던 학생들에게 화가 나신건지 시험을 기대보다 너무 못봐서 그런것인지는 모르겠다.
그 때 교수님이 하신 말씀 중, 2000년에 자신이 이 학교에 오면서 우리 국립대를 경북대만큼 만드는것이 목표라고, 너희들이 따라준다면 몇년안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노력하자고 말씀하셨다. 난 그때 처음으로 그 교수님이 존경스러웠다. 아니 대학생활 4년을 수학 하면서 처음으로 존경하게 된 교수님이 그 교수님이다.
저 교수님이 계신 학과는 지금 매우 잘 알려져 있다. 2000년도에 치과대학 다음으로 경쟁률 있는 학과는 내가 졸업을 한 학부로 알고있다. 같은 학부에 있는 학과로 매번 서로 우수한 신입생을 가져오기 위해 경쟁하는 학과였지만, 지금은 학교에서의 지원부터 시작하여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알고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난 학교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학교의 위상을 떨치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가까운 만학도를 위한 인문고등학교에서 정보화영역 교사로 자원봉사를 한 일이었다. 조금 힘은 들지만 보람도 있고, 오히려 아버님, 어머님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두번째가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학생창업을 시작한 일 이었다. 지금와서 보면, 막상 내가 한 일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몇 년 되지 않는 기간동안 우리는 정말 많은 일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생초짜" 들이 모여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니 삐걱되는 일도 많았고, 잘 안되는 일도 많았다. 시간으로 구입한 경험 이라는 것이 우리를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조금 나은 사람들로 만들어주었던 것 같다. 편의점에가서 "나 저번달에 백만원정도 쓴 것 같아." 라고 서로 대화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처음 들어갈 때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내가 도움이나 될까 라고 생각했지만, 회사를 키우고 키워서 사람들에게 알린다면 우리 학교가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갖고 조금 용기를 내 보았다. 친구들이 노력한 끝에 강릉 이라는 지역 내에서는 꽤 입지가 큰 회사로 성장했지만, 내가 졸업하기 전에 그 이상으로 키운 회사를 보는 것은 무리였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이유로 남들보다 조금 졸업이 빨랐던 터라 회사는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졸업을 한 후에도 함께 할 용기가 나에겐 없었다.
6월 28일. 228.7km를 달려서 찾아간 곳. 오랜만에 찾았다. 보고싶은 사람들이 있는곳.
4개월만에 찾은 이곳. 외형적으로는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와 백기가 없는 사무실은 그동안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매번 힘들게 서류를 작성하여 따내던 국가 사업들은 이제, 고정적(-_-)으로 따낼 수 있는 일이 되었고. 유실장님이 합류하면서 우리는 할 수 없었던 영업망을 구축하여 이제 창업 4년만에 진정한 회사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28일 찾은 사무실은 한산했다. 다들 잦은 출장과 계속되는 야근으로 피곤에 절어있는 상태였고, 다음날 피티가 있는 원배는 PPT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보고싶은 사람들과의 오랜만에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마치 잡동사니 저장창고와 같이 변해버린 내 예전자리. 그새 돈좀 벌었다고 비품을 가득 채워놓은 모습들. 몇몇 모습을 제외하면 전혀 변함없는 사무실풍경.
쉴새없이 쏟아져 나오는 내 말에 나조차도 놀랐다. 애들과 이야기 하면서 '내가 정말 많이 외로웠었구나.' 라고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던 내 모습이 그리웠다.
형돈이에게 주고간 작별선물. 정말 잘 간직하고 있구나.
사무실을 떠나고, 오랜만에 도착한 원배네 펜션.
여기 또한 변한게 없다는 것은, 내가 떠난것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변함없는건 우리 귀여운 데데도 마찬가지다.
보쌈이 모자른 이유로 어머님은 이런 것까지 따로 시켜주셨다.
시즌 바로 전의 해수욕장은 이리도 깨끗하다.
XXX의 구멍난 양말도 변함없고,
이런 짓도 변함이 없다. 이런 미친짓조차 왜이리 그리운지..
계속 올리다 보니까 조금 창피..하긴 하지만 이게 우리다.
연 이틀간 비싼 보쌈을 먹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목이 아프도록 말을 하고, 질리도록 괴롭히고, 정말 재미있게 즐겼다. 얼마나 그 시간이 좋았던지, 눈물까지 나올 뻔했다. 헤어질 때 눈물 흘리고 창피해한걸 생각하면 다시 그럴 수 없었기에 참았다.
그리웠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하고싶었던 말을 뱉어내고, 바다를 보며 답답한 가슴을 좀 털어내고 나니, 드는 생각은 내가 아직은 살아있구나. 너희들이 있으니까 내가 이만큼 할 수 있구나.
커플들 사이에 낀 후 Wa bar에서 무표정샷 한번
덧붙임. 1일이 2주년인 원배. 나때문에 스페셜 이벤트도 못하고, 똑같은 날을 보내게 해서 미안. 형이 좋은 선물 하나 사줄께.
덧붙임. 데데의 운동 동영상
그저그런 2년이 지나고, 2학년 시절 컴퓨터 실습조교를 할 때, 신입생들에게 자기소개서를 써오라는 과제를 내 준적이 있다. 내가 담당하는 클래스는 인문대학. 게 중에는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이 있었나보다. 고등학교 때는 잘나가는 명문고를 나왔는데, 수능시험을 망쳐서, 운이 좋지 않아서, 내가 지금 여기, 강원도 강릉에 있다는 "신세한탄" 자기소개서가 꽤 많이 보였다.
제출한 자기소개서에 대한 내 의견을 학생 한명한명에게 메일로 보내주었다. 물론 적지않은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이것이 내가 조교를 하기로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기 때문에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대학 4년 중 1학년 시절을 제외하고 나머지 3년간 컴퓨터실습 조교활동을 했다. 매학기 수업이 시작하자마자 난 자기소개서를 과제로 내주었고, 4명 중 1명정도의 학생은 신세한탄 자기소개서를 작성하였다. 나도 그 시절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기에, 그 학생들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고 느꼈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은 참견이었지만.
대학 3학년 총회에서 학생회 학술부장 소개인사를 할 때였다. 난 선배들과 후배들에게 정말 하고싶은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잘나가던 이 국립대학교가 어쩌다가 대한민국 중하위권 대학으로 취급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 불만사항과 우리가 노력하면 바꿀 수 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 때 사람들이 얼마나 호응을 해 주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 점점 후퇴하고만 있는 학교를 바라보면 부질없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교 마지막 학기. 4학년 2학기 때, 우연히 타과 전공수업을 듣게 되었다. 타과전공이라고 해도 같은 학부내의 학과라서 그다지 이질감은 없었다. 수업은 그 학과의 2학년 생들을 대상으로 한 수업이었다. 수업 첫날에 자신만 믿고 따라오면 나머지 학년 편하게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교수님의 호언장담을 듣고, 속으로 '저런 소리를 처음부터 하는 교수치고 잘하는 사람 보지 못했다' 라는 생각을 했다.
학기 중반까지는 진도는 확실하게 빼주고, 빠진 일수 만큼 보강도 확실하게 해주셨다. 그러던 어느날, 아마 중간고사가 끝난 뒤로 기억한다. 갑자기 수업을 하던 도중 교수님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너무 말을 안듣고, 공부를 안하던 학생들에게 화가 나신건지 시험을 기대보다 너무 못봐서 그런것인지는 모르겠다.
그 때 교수님이 하신 말씀 중, 2000년에 자신이 이 학교에 오면서 우리 국립대를 경북대만큼 만드는것이 목표라고, 너희들이 따라준다면 몇년안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노력하자고 말씀하셨다. 난 그때 처음으로 그 교수님이 존경스러웠다. 아니 대학생활 4년을 수학 하면서 처음으로 존경하게 된 교수님이 그 교수님이다.
저 교수님이 계신 학과는 지금 매우 잘 알려져 있다. 2000년도에 치과대학 다음으로 경쟁률 있는 학과는 내가 졸업을 한 학부로 알고있다. 같은 학부에 있는 학과로 매번 서로 우수한 신입생을 가져오기 위해 경쟁하는 학과였지만, 지금은 학교에서의 지원부터 시작하여 상대도 되지 않는다고 알고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난 학교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학교의 위상을 떨치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가까운 만학도를 위한 인문고등학교에서 정보화영역 교사로 자원봉사를 한 일이었다. 조금 힘은 들지만 보람도 있고, 오히려 아버님, 어머님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두번째가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학생창업을 시작한 일 이었다. 지금와서 보면, 막상 내가 한 일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몇 년 되지 않는 기간동안 우리는 정말 많은 일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생초짜" 들이 모여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니 삐걱되는 일도 많았고, 잘 안되는 일도 많았다. 시간으로 구입한 경험 이라는 것이 우리를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조금 나은 사람들로 만들어주었던 것 같다. 편의점에가서 "나 저번달에 백만원정도 쓴 것 같아." 라고 서로 대화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처음 들어갈 때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내가 도움이나 될까 라고 생각했지만, 회사를 키우고 키워서 사람들에게 알린다면 우리 학교가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갖고 조금 용기를 내 보았다. 친구들이 노력한 끝에 강릉 이라는 지역 내에서는 꽤 입지가 큰 회사로 성장했지만, 내가 졸업하기 전에 그 이상으로 키운 회사를 보는 것은 무리였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이유로 남들보다 조금 졸업이 빨랐던 터라 회사는 남겨두고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졸업을 한 후에도 함께 할 용기가 나에겐 없었다.
6월 28일. 228.7km를 달려서 찾아간 곳. 오랜만에 찾았다. 보고싶은 사람들이 있는곳.
4개월만에 찾은 이곳. 외형적으로는 전혀 변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와 백기가 없는 사무실은 그동안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매번 힘들게 서류를 작성하여 따내던 국가 사업들은 이제, 고정적(-_-)으로 따낼 수 있는 일이 되었고. 유실장님이 합류하면서 우리는 할 수 없었던 영업망을 구축하여 이제 창업 4년만에 진정한 회사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28일 찾은 사무실은 한산했다. 다들 잦은 출장과 계속되는 야근으로 피곤에 절어있는 상태였고, 다음날 피티가 있는 원배는 PPT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보고싶은 사람들과의 오랜만에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마치 잡동사니 저장창고와 같이 변해버린 내 예전자리. 그새 돈좀 벌었다고 비품을 가득 채워놓은 모습들. 몇몇 모습을 제외하면 전혀 변함없는 사무실풍경.
쉴새없이 쏟아져 나오는 내 말에 나조차도 놀랐다. 애들과 이야기 하면서 '내가 정말 많이 외로웠었구나.' 라고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리던 내 모습이 그리웠다.
형돈이에게 주고간 작별선물. 정말 잘 간직하고 있구나.
사무실을 떠나고, 오랜만에 도착한 원배네 펜션.
여기 또한 변한게 없다는 것은, 내가 떠난것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변함없는건 우리 귀여운 데데도 마찬가지다.
보쌈이 모자른 이유로 어머님은 이런 것까지 따로 시켜주셨다.
시즌 바로 전의 해수욕장은 이리도 깨끗하다.
XXX의 구멍난 양말도 변함없고,
이런 짓도 변함이 없다. 이런 미친짓조차 왜이리 그리운지..
계속 올리다 보니까 조금 창피..하긴 하지만 이게 우리다.
연 이틀간 비싼 보쌈을 먹으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목이 아프도록 말을 하고, 질리도록 괴롭히고, 정말 재미있게 즐겼다. 얼마나 그 시간이 좋았던지, 눈물까지 나올 뻔했다. 헤어질 때 눈물 흘리고 창피해한걸 생각하면 다시 그럴 수 없었기에 참았다.
그리웠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하고싶었던 말을 뱉어내고, 바다를 보며 답답한 가슴을 좀 털어내고 나니, 드는 생각은 내가 아직은 살아있구나. 너희들이 있으니까 내가 이만큼 할 수 있구나.
커플들 사이에 낀 후 Wa bar에서 무표정샷 한번
덧붙임. 1일이 2주년인 원배. 나때문에 스페셜 이벤트도 못하고, 똑같은 날을 보내게 해서 미안. 형이 좋은 선물 하나 사줄께.
덧붙임. 데데의 운동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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